-
해태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끈 원조카테고리 없음 2022. 3. 18. 17:34
이상윤은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주역으로 국가대표 출신 투수 김영남과 원투펀치를 형성하려다 원년 부상에 시달리며 7승5패의 작은 기록을 남겼다.
이상윤의 당시 별명은 원폭이었다. 별명에서 보듯 그의 강속구는 무게가 일품이었다. 잘생긴 외모도 멋있었지만 그의 직구는 지금 생각해도 최고였다. 지금 생각하면 큰 스피드는 아니지만 당시 145km를 태연하게 달리는 이상윤은 마운드의 지배자였다.
본격적으로 이상윤의 이름을 알린 시즌은 해태 타이거즈가 명문 구단으로 떠오른 1983년이었다. 프로야구 원년 18명의 선수로 한계를 느낀 해태 타이거즈는 해외유학에서 돌아온 김응룡 감독을 새 수장으로 영입해 코칭스태프를 개편하고 새 선수 10명을 영입했다. 이때 영입한 선수 가운데 재일교포로 일본 프로야구를 기피했던 포수 김무정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과 한국의 야구 수준 차가 워낙 컸기 때문에 김무종이 포수 마스크를 쓰며 서먹서먹했던 이상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줬다. 이상윤은 83년 팀의 에이스로 거듭나 46경기 229.1이닝을 소화하며 20승을 거뒀다. 20승 투수로서 재미있는 기록은 6세이브를 따내며 세이브 부문 3위에 올랐다. 그야말로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마운드에 올랐다. 이상윤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를 따내 MBC 청룡에 4승 1무로 패퇴시키는 일등 공신이 됐다. 정규시즌에서도 코리안 시리즈에서도 해태의 최고 에이스는 이상윤이었다.
1984년에도 이상윤의 활약은 계속됐다. 팀은 우승에 심각한 후유증을 안은 돈이 없는 구단이라 우승 후 우승 선수에 대한 포상이 약했고 취약했던 보상은 84시즌 성적에 그대로 반영됐다. 하지만 이상윤은 에이스로서 묵묵히 제 몫을 해냈다. 40경기에 나가 211.2이닝을 소화하며 10승13패 8세이브를 기록했다. 성적으로 보듯 84년에도 선발과 마무리의 구분이 없었다. 2년간 쉬지 않고 440이닝 이상 공을 던진 후유증으로 85년간 부상에 시달렸다. 1985년 이상윤이 제대로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 입단한 선동렬은 자연스럽게 이상윤의 에이스 계보 뒤였다.
이것으로 끝이 아닌가 싶던 1986년 이상윤은 10승 투수로 복귀했다. 하지만 해태 에이스는 24승을 거두며 경이적인 평균자책 0.99의 새 지평을 쓴 프로 2년차 선동렬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상윤은 신인 차동렬 김정수와 최강 해태의 마운드를 지키며 해태의 두 번째 우승 신화를 썼다. 이들이 지켜온 86시즌 해태 마운드의 평균자책점은 2.86으로 역대급 기록을 갈아 치웠다. 이상윤과 선동렬 등 강속구 투수 2명이 지키는 마운드를 보유한 해태 타이거즈는 1989년까지 4연속 챔피언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명가의 기반을 닦았다.
이상윤은 1987년 다시 부상으로 쓰러지며 무너졌다. 당시 한국 프로야구 환경에서 재활이란 개념은 너무 생소했다. 뒷말이긴 하지만 86년 재활이 완전치 못한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던진 것이 87년 다시 무너졌다. 하지만 이상윤은 놀라운 투수였다. 87년 부진으로 자존심을 구겼던 이상윤은 88년 부활해 16승을 거두며 다시 에이스로 부활했다. 돌이켜 보면 마지막을 준비하는 투수의 불꽃 집념이었다. 88년 다시 한번 우승에 크게 기여한 이상윤은 89년 쓸쓸히 마운드를 내려왔다. 시즌 중 한 경기에 출전해 1.2이닝만 소화하며 그의 프로야구 생활을 정리했다. 놀라운 투지에서 혹사 후유증을 딛고 부활했지만 여기까지였다.
이상윤은 8시즌 동안 65승 46패 14세이브의 화려한 통산 기록을 남기고 1989년 은퇴했다. 은퇴 후 1990년부터 2004년까지 해태-기아 투수코치, 수석코치를 거쳐 2005년 삼성 투수코치 이후 야구계를 떠났다.
당시 모든 에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선발 불펜을 가리지 않고 마운드에 올랐다. 선발 5일 로테이션 같은 최근 시스템은 당시 투수들에게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에이스급 투수라면 혹사의 강도는 더욱 심했다. 이상윤은 당시 강견의 대명사 같은 선수였다.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지만 투구 폼에 무리가 많은 투수였다. 여기에 자존심도 강한 선수였던 이상윤에게 에이스의 중압감은 그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켰을 것이다. 아쉬움도 컸지만 해태왕조의 원조 에이스는 이상윤이었다. 검은 유니폼에 잘생긴 용모가 빛났던 마운드 위의 마왕 이상윤이 오늘따라 그립다.